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위스 용병 (문단 편집) === 몰락 === 1520년대, [[카를 5세]]가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유럽 세계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약관의 젊은 황제인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외에도 [[부르고뉴]]와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못지 않게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원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카를 5세와는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밀월관계가 된 스위스 용병들에게 있어서도 이는 공통의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들의 모국인 [[스위스]]가 [[합스부르크]]와는 숙명의 악연 관계였던데다, 라이벌인 [[란츠크네히트]]는 다름아닌 신성 로마 제국에 가담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립은 스위스 용병들의 결속을 더욱 굳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더 한층 프랑스로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니 스위스 용병은 사실상 프랑스의 외인부대나 다름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년]])는 스위스 용병의 위력을 검증할 역사적인 실험대가 되었다. 그보다 10년 전의 노바라 전투에서 무찔렀던 란츠크네히트와 가진 역사적인 재대전이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용병들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바랜 빛을 되찾길 원했고, 란츠크네히트 역시 노바라 전투에서의 한을 되갚을 기회였다. 또한 이것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전으로서 본격적인 이탈리아 전쟁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스위스 용병들의 '''대참패였다.''' 이는 스위스 용병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탓이었다. 적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통치자이기도 했으며, 당연히 제국군의 이탈리아 전역에도 스페인 전력이 일부나마 투입되었다. 이들 스페인 병력은 수세기의 [[레콘키스타]]를 통해 화기와 신전술, 발달한 축성술로 무장한 강군이었고, 휘하에 있던 [[란츠크네히트]]도 그들의 선진성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스위스 용병들은 그간 줄곧 승리를 안겨주었던 재래식 전술로만 일관하여 [[닥돌]]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마리냐노 전투 때는 정규군과의 싸움이었고 중과부적 상태에서의 패배였으니 참작의 여지라도 있었으나, 비코카 전투에서의 패배는 같은 용병들이 주력이 된 대결이었으며 프랑스를 등에 업고도 졌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였다. 더구나 그렇게 깔보던 란츠크네히트를 상대로 졌으니 자존심에 입은 타격은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몰락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525년]]에 벌어진 [[파비아 전투]]는 비코카 전투에 이어 스위스 용병의 위상에 결정타를 선사했다. 이 전투는 용병들은 물론 양 진영의 정규군과 외부세력까지 모두 참전한 이탈리아 전쟁 최대의 격전이었으며, 스위스 용병들에게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다. 게다가 그 직전에 [[카를 5세]]가 란츠크네히트를 동원하여 본국인 [[스위스]]를 직접 들이치기도 했기 때문에 스위스 용병들의 위기의식과 결속력은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태였다. 숫적으로도 우위였으니 그야말로 져서는 안 될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대차게 전멸하고 말았다.'''[* 란츠크네히트와 전투하는 도중에 스페인 총병 2천여 명이 지원을 오기도 했다...] 파비아 전투는 스위스 용병들이 궤멸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용주인 [[프랑수아 1세]]까지 포로로 사로잡힌 대참패였고, 이러니 프랑스 입장에서도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에게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내준 치욕의 패배였다. 이 시점을 경계로 스위스 용병의 명성은 재기불능으로 치달았으며, 처음으로 총을 제식화한 [[스페인]] 군대와 란츠크네히트가 유럽 최강군의 자리로 올라선다. 1525년을 스위스 용병 황금기의 끝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스위스 용병이 전투의 중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격감한다. 물론 이후로도 용병으로서 자주 참전했지만 과거의 찬란한 명예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몰락에 접어들고서도 이들은 여전히 명예와 고용주에 대한 충성을 중시했으며, 그 결과 [[졌잘싸|'패배했음에도 빛나는']] 훈훈한 무용담을 낳게 된다. 사실 근대에 이르면 용병의 전투력보다는 외국인이라 자국민보다 오히려 신뢰할 수 있고, 장기간 고용할 수 있어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좋은 예로 독일인 용병들은 유럽 각국의 전장에서 [[란츠크네히트]]가 몰락한 뒤에도 무장만 창 대신 총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527년 벌어진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 당시, 스위스 용병들은 [[카를 5세]]의 군대에 맞서 [[교황]]과 [[로마]]를 사수하고자 치열하게 싸웠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용병들과는 차별화되는 이들의 충성심만은 여전하여 42명만이 살아남는 패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고용주인 교황을 위하여 싸웠다. 이 영웅적인 활약으로 인해 스위스 용병은 체면을 살릴 수 있었고 [[바티칸]]에서는 지금까지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며, 매년 로마가 함락당한 [[5월 6일]]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도 16세기부터 이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의 실정으로 촉발된 [[네덜란드]]의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서 스위스 용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30년전쟁]]과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에 동원되었고, 스페인이 워낙 지역 갈등이 심한 나라인지라 갖은 [[내전]]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스페인사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마지막 활약은 [[나폴레옹 전쟁]]기에 벌어진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함락될 때까지 그 사명을 다했다. 물론 프랑스측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했으므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는데 양측 모두 어쩔 수 없이 죽도록 싸웠지만 이 일이 교훈이 되어 이후 스위스 내에서 자국민의 용병 수출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었다. 결국 스위스는 1848년에 [[스위스 연방 헌법|연방헌법]]을 제정하여 연방국가가 되면서 헌법으로 용병 수출을 금지했다. 위와 같은 에피소드 때문에 충직한 스위스인 용병의 평가는 매우 높았고, [[서브컬쳐]]에서 볼 수 있는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는 용병상은 스위스 용병이 모티브가 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